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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암성 - 패왕조산성
패왕조산성
중문: 霸王朝山城
본명: 위나암성 尉那岩城
위치: 길림성 집안시 재원진 패왕조촌 고려구
중문: 吉林省 集按市 财源镇 霸王朝村 高丽沟
규모: 둘레길이 1260m,  해발 863m
유형: 산정포곡식
축조년대: 고구려 초기 (유리명왕)


서남으로 혼강(渾江)과 30㎞ 거리에 환인현(桓仁縣)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 멀리 바라보인다. 패왕조촌에서 뻗은 계곡이 동북으로 향하여 양쪽 산맥은 기복을 이루면서 점차 높아져 2.5㎞ 지점에서 절벽처럼 험해지면서 양쪽이 합쳐져 해발 764m를 이룬다.

패왕조산성은 이 산봉우리 사이에 축조되었으며 일부 경사진 언덕에만 쌓여 있다. 성의 주변은 많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나 산세는 비교적 낮은 편이고, 성의 동서면과 북벽의 서부는 험준한 절벽을 이룬다.

성안에는 내〔川〕가 하나 있는데 좁은 물줄기가 남류하여 계곡의 원천을 이룬다. 또, 북에서 흘러내린 혼강은 성의 서편을 지나 패왕조촌 앞에서 돌아 서북의 신개하(新開河)로 흘러든다. 성은 산세의 지형조건을 최대로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기복을 이루는 지점과 남면의 협곡에는 돌로 성벽을 쌓았으며 지세가 낮은 곳은 높게 쌓았다. 그 중 서벽남단과 북벽동단은 비교적 높게 쌓았다.

성의 규모는 동벽 298m, 서벽 420m, 남벽 247m, 북벽 295m로 전체 성벽의 길이는 1,260m에 이른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계통으로 길이 20∼51㎝, 높이 13∼26㎝, 너비 29∼42m 크기의 약간 가공한 장방형이다. 성벽의 규모는 곳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가장 높은 곳이 21층으로 쌓은 5.2m, 너비가 1∼4m 정도이다.

서·북·동 3벽에는 몇 단을 쌓은 여장(女墻)이 있는데 여장의 규모는 대개 높이 0.5m, 너비 1m 전후이다. 여장에 사용된 석재는 가공하였으며 축조할 때 내외면을 비교적 정연하게 쌓고 내부의 공간은 잡석으로 채웠다. 성의 네 모퉁이에는 성밖으로 치(稚)를 설치한 흔적이 보인다. 동남치는 5.5×6m, 서남치는 길이는 알 수 없으나 너비는 7.5m이다. 치의 위에는 본래 각루(角樓)가 있었을 것 같다.

성문은 남북 두 곳에 있었는데 북문은 북벽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편재하고 문도(門道)의 양측이 무너져내려 채워져 있으나, 성벽의 내측과 문도의 양벽이 굽어지는 성벽의 기단부는 원각(圓角)이며 너비는 3m이다. 북문 외면의 약 8m 지점에 1단으로 된 성벽의 기초부가 있는데, 동단은 북장(北墻)과 연결되어 이 구조가 본래 반원형 옹성임을 가능하게 하고, 성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자연 좌측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또, 남문은 남벽의 중앙에서 서측으로 편재하여 있으나 무너져내려 있으며 절단된 너비는 9m 정도이다.

북벽의 동단에는 기둥구멍 18개가 여장 밑에서 확인되었는데 동서로 일직선으로 설치되었다. 간격은 1.45∼1.5m이며 동단의 3개의 구멍 간격은 1.9∼2m 간격이다. 기둥구멍은 한 변이 27∼30㎝, 깊이 50㎝의 방형이며 같은 기둥구멍이 동벽의 남단에도 1개가 확인되었다. 이들 구멍은 노(弩)를 고정하던 기둥구멍으로 추정된다.

성안에서는 도형철편(桃形鐵片)·철대구(鐵帶鉤)·철정(鐵鋌)·동촉(銅鏃)·돌절구〔石臼〕·그릇편〔陶片〕 등도 출토되었다. 이 성은 출토유물로 보아 고구려의 중요한 산성으로 보이며 성벽의 구조물인 성문·기둥구멍들의 형태가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과 흡사하다. 이 성의 전략상 중요성은 혼강의 동쪽에 위치하여 신개하의 계곡을 방어하던 중요한 성곽으로, 부이강(富爾江)을 따라 혼강을 건너 신개하를 거슬러 올라가 동남의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으로 통하였다.

역사적의미:

石城 유적으로 『集安縣鄉土志』(1931년)에는 “산성 부근 강 연안에도 석성이 있는데, 홍수로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큰 돌만 몇 개 보인다”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集安縣志』(1931년)에는 “성곽이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그 전에는 큰 돌이 몇 개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 뒤(1915년 이후) 현지 주민들이 가옥을 지으면서 채석을 하여 (당시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함. 1962년 조사 당시 현지 주민이 옛날에는 석성 유적이 북둔촌 서쪽의 혼강 강변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미 볼 수 없었다고 함. 고분군은 산성에서 4km 정도 떨어진 천안구촌 일대에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3곳 있으며 모두 70여기 정도됨. 관애는 패왕조산성에서 신개하를 따라 40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望波嶺關隘가 나오는데 이곳은 입지조건상 신개하를 거슬러 올라오던 적군을 방어하던 군사시설로 추정됨.
지정학적으로는 고구려 첫번째 도성이 있었던 환인 오녀산성과 30km 거리이며, 패왕조산성이 위치한 신개하 하구 일대는 환인분지나 부이강 방면에서 혼강 유역을 지나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으로 나가는 교통로의 길목임.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성설으로 1962년 조사 결과, 거주나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산 위에 위치하였고, 둘레도 1km 남짓 밖에 안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거주지로서의 기능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 다음, 군사적 성격'이 강한 성이었다고 강조함. 국내성이 수도일 때 신개하 하구 일대를 공제하면서 수도원 외곽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 산성의 하나로 망파령관애와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弧形방어선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특히 집안 산성자산성, 환인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에 있는 성가퀴 안쪽의 기둥구멍이 이 산성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패왕조산성은 이들과 함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입체적 군사방어 체계를 구성한 것으로 파악됨. 3세기 중엽 제3현토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을 거쳐 판차령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관구검을 비롯하여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 왕조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는 이 일대를 지나쳤을 것으로 추정됨(방기동, 왕면후, 여호규).
둘째, 위나암성설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은 郊豕가 도망가기에 너무 먼 거리라는 점을 근거로 환인 오녀산성에서 30km 떨어진 패왕조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하였고, 더욱이 패왕조산성 일대는 혼강·신개하·부이강의 합류지점으로서 '山水深險'하다는 기록과 합치하며, 패왕조산성은 산봉우리 위에 위치하였고 내부에는 샘(泉水)도 있어 '巖石之地'로서 '泉水'가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파악함(이전복, 손진기, 왕면후, 풍영겸).
셋째, 거주성설으로 2001년 패왕조산성을 탐방했을 때 많은 건물지와 토기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거주나 경작지에 적합하지 않다는 종전의 인식을 바꾸어, 산비탈을 거주지로 활용하고, 성 바깥의 계곡을 논밭으로 경작했으며, 주변의 혼강과 신개하 일대에는 고기잡이와 사냥이 발달했다고 추정하며, 고구려 시기의 중요한 거주 성곽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함(경철화).

* 산성은 골짜기입구에서 5km정도 들어가야 존재하는데, 과거에는 골짜기 전제가 성터였다고 봐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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