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상산성(大和尙山城)' 혹은 '대혁산산성(大赫山山城)'이라고도 한다. 금주구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20km 떨어진 대흑산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663m의 산정을 성의 동북쪽 정상으로 삼아 서쪽과 남쪽으로 뻗은 산능선상에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서남쪽으로 계곡을 안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5km이며, 석회암돌로 쌓은 석축산성인데, 성문은 계곡의 입구인 서문(西門) 하나뿐이다. 성내에는 석고사(石鼓寺)가 있는데, 본래 이름은 당왕전(唐王殿)이다. 산성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데다가 지세가 험준하기 때문에 산성을 지키면 수륙의 요충을 방어할 수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자치통감 資治通鑑》에는 비사성을 "사면이 절벽이고 오직 서문만이 오를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대흑산산성의 형세와 일치하고 있다.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에 반드시 수군(水軍)이 동원되어 비사성을 둘러싼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는바, 문헌기록을 보면, 우선 《수서 隋書》에는 614년(영양왕 25)의 수양제 3차 침입시에 수나라 장군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서 唐書》에는 645년 당태종의 침입시에 장량(張亮)이 수군을 이끌고 산동반도의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비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녀 8천명을 포로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 때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요해주(遼海州) 남해군절도(南海軍節度) 관할이었고, 중국의 영토가 된 후에는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에 속하였으며, 금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하였다.
비사성은 중국에서 평양에 갈 때 꼭 들러야 하는 교통상의 요로(要路)에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은 곳이다. 비사성의 지명 유래는 '장성(長城)'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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