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시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동쪽 강안에 있으며, 북으로 용담산성(龍潭山城)과 마주보고 있다. 이 산성을 부여(夫餘)의 왕성(王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송화강에서 상대높이 60m쯤의 독립된 구릉에 있으며, 타원형을 이루면서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들었다.
정상부를 평탄한 대지로 만든 내성(內城)은 거의 성벽을 남기지 않았으나, 동서길이 62m, 남북너비 15m의 범위가 된다. 중성(中城)은 내성의 동남향한 경사면을 따라 53.5m 내려간 지점에서 다시 산허리를 타원형으로 돌려서 동서길이가 170m, 남북너비가 62m, 성벽의 높이는 12m이다.
외성(外城)은 중성에서 다시 35m쯤 내려와 역시 타원형으로 산을 돌려 쌓았는데, 동서길이 230m, 남북너비가 115m, 둘레는 약 650m에 이르고, 성벽의 높이 10m이고 성벽 윗면의 너비 3m이다.
내성은 근대에 군사적 보루로 이용하면서 파괴되었고, 외성에는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었고, 동북쪽 모서리에 저수지도 있었다. 성안에서는 청동기시대로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시기의 토기와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이 산성의 동쪽과 동남쪽으로는 평지까지 둘러 쌓은 커다란 판축(版築)의 토성이 있어서 별도로 이것을 ‘남성자(南城子)’라 부른다. 이 성벽은 길이가 1,050m에 달하며, 성벽의 남은 높이가 5∼6m이고, 성벽 윗면의 너비가 1m 남짓하다. 성벽의 외곽으로는 또 해자(垓子)가 돌려져 있으나, 성벽은 남동쪽이 뚜렷할 뿐이다.
문터는 남문터와 북문터가 있다. 남문은 16m가 단절되었는데, 바로 안쪽에 남북 길이 150m, 동서 너비 73m 크기로 1∼1.5m 높이의 긴네모꼴 고대지(高臺地)가 있다. 북문터는 44m 너비로 성벽의 단절부가 있다. 성안에서는 한(漢)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시기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성은 남성자 및 북쪽의 용담산성과 더불어 고구려와 관련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부여의 원책(圓柵)과 합치되는 요소가 있어서 전기(前期) 부여의 왕성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이건재(李健才)는 용담산에서 동단산에 이르는 지역이 부여의 왕성이었다고 추측하고, 무국훈(武國勛)은 동단산 동남쪽의 남성자가 중국측 기록에 보이는 부여의 원형성책과 같으며, 후일 고구려가 점령한 시기의 유물이 풍부하므로 역사기록에 나오는 녹산(鹿山)과 결부하여 북부여(北夫餘)의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동단산의 동북쪽 2.5㎞ 거리에 있는 용담산성 및 그 주변의 삼도령자산성(三道嶺子山城)과 함께 동단산성을 용담산성의 위성(衛城)으로 보는 동학증(董學增)은 용담산성을 북부여성으로 보아 부여 발상(發祥)의 터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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