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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 고조선 알타이
와당 벽화 비문 인장 사료
장군총
장군총
중문: 将军坟
본명:
위치: 길림성 집안시 용산
중문: 吉林省 集安市 龙山
규모: 둘레길이 m,  해발 m
유형: 적석총
축조년대: 고구려 중기


이 무덤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05년에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인 샤반(Chavannes, E.), 일본인 세키노[關野貞] 등이 조사해 『퉁바오(通報)』·『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 등에 발표한 후부터이다.

고구려의 무덤은 압록강 중류의 통구지방과 환인(桓仁)지방, 대동강유역의 평양지방에 주로 밀집분포되어 있다. 특히, 장군총은 규모가 태왕릉(太王陵)·천추총(千秋塚) 다음으로 큰 최대형급인데다가 많은 적석무덤 중에서도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7층이나 되는 높이로 축조되었고, 형체가 가장 잘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왕릉으로 추정되어왔다. 위치는 통구평야를 서남향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이다. 서남으로 흘러가는 압록강으로부터 약 1㎞ 거리에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가 서있다. 다시 비석에서 서남쪽 0.5∼1㎞거리에는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오회분(五盔)·사신총(四神塚) 등이 위치해 있다. 현재의 집안현성으로부터는 동북으로 약 4.5㎞ 떨어져 있다.


1) 외부구조
무덤이 위치한 자리는 주위에 잔자갈을 넓게 깔아서 일정한 넓이의 묘역(墓域)을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그 밖에 목책이나 돌담이 둘러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실제로 돌담이 무너진 흔적으로 자갈이 한 변이 약 70∼80㎝ 가량인 사각형으로 둘러져 있다.
그리고 이 묘역 밖 뒤 좌측에 배총군(陪塚群)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적석무덤은 단순적석총(單純積石塚), 기단적석총(基壇積石塚), 기단계단식 곽적석총(基壇階段式槨積石塚), 기단계단식 석실적석총(基壇階段式石室積石塚), 봉석석실적석총(封石石室積石塚) 등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르면 장군총은 기단계단식 석실적석총에 포함된다. 무덤은 화강암으로 7층의 피라미드형[截頭方錐形]을 만들었다. 석재는 화강암을 장대석[長臺石 : 장방형 입방체]으로 규격에 맞게 자른 다음 표면을 정성들여 갈아서 만들었다. 이 장대석들은 모두 1,100여 개에 달한다. 돌의 크기는 반드시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제1층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진 듯하다. 제1층에는 길이 약 2m, 두께 1m 가량의 크기가 있는가 하면, 길이 2m, 높이 0.7m 정도도 있다. 가장 큰 장대석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m도 있다.
제2층 이상은 돌의 두께가 약 0.5m 가량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각 층의 맨 아래 바닥에는 특별히 길이 약 5∼6m 가량의 긴 장대석도 약간씩 들어 있다. 장대석을 쌓은 각 층의 단수를 보면, 제1층에서는 4단, 제2∼7층까지는 각 층 모두 3단이다.
그리고 각 층의 상면 장대석은 위층의 하면 장대석을 고정시키기 위해 凸형으로 하여 위 장대석에 맞게 하는 등 견고성을 높이는데 기술적으로 배려되어 있다. 정상부는 석회와 자갈을 섞어서 돔형으로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무덤 제1층의 평면은 정방형으로, 각 변의 길이는 31.5m이고, 높이는 12.4m이며, 면적은 960㎡나 된다.
그리고 각 모서리[隅角]는 방위에 맞게 하였는데, 석실 입구의 좌측 모서리(向前方)는 남쪽, 우측은 서쪽으로 각각 향하게 하였다. 이것은 극히 드문 예로서, 일반적으로는 태왕릉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면을 방위의 정면에 해당시키고 있다.
기초부에는 지면을 깊이 5m 가량 파고 그 안에 길이 2m, 너비 1m 정도의 자연석을 다져넣었다. 그 위에 큰 돌을 깔았는데, 제1층 바닥돌보다 밖으로 4m 가량 나오게 하였다. 이 부분에는 제1층의 각 면의 적석이 밖으로 밀려나가지 않도록 높이 약 5m 가량의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을 각 면에 3개씩 기대어 세웠다. 북쪽면의 1개가 없어져서 모두 11개가 남아 있다.
무덤의 정상부에는 돔형의 기단석에 돌려가면서 둥근 구멍이 21개 뚫려 있어서 난간을 설치한 흔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정상부와 각 층의 상면(테라스)에서 다수 발견된 기와들은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덮었던 지붕용으로 추측되고 있다.

2) 매장주체시설
매장주체시설은 제3층의 상면을 바닥으로 하여, 정방형의 현실과 남쪽으로 길게 연도(羨道)가 부설된 석실로 되어 있다. 석실의 각 벽은 2개의 긴 장대석을 아래위가 엇갈리게 쌓아올렸다. 벽면을 거의 수직에 가깝게 6단을 쌓고 그 위 1층을 역계단식 평행줄임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위에 대략 장축 길이 4.5m, 너비 3.8m나 되는 거대한 판석을 올려서 평천장으로 마무리하였는데, 이 면적은 60여㎡나 된다. 연도는 길이 약 5.5m이며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연도는 현실 바닥과 같게 하였고, 외연도의 바닥은 일단 높여서 제4층의 상면과 같게 하였다.
연도벽은 2개의 장대석을 3단 쌓았으며, 천장은 현실과 같은 평천장이다. 현실 입구는 문짝(돌 또는 나무)을 달 수 있도록 기둥모양[柱形]으로 돌출시켰다. 연도 입구는 문의 하방석과 같이 거대한 장대석을 가로놓아 일단 높게 하였다. 입구는 현재 열려 있지만 본래 제4층의 벽석 속으로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폐쇄되게 하였다.
석실의 벽면과 천장은 당초에는 석회를 발랐다고 생각되나, 모두 탈락되어 약간은 바닥에 깔려 있다. 현실 내부에는 길이 3.7m 너비 1.5m의 장방형 판석을 바닥에 올려놓아 2개의 관대를 석실의 장축방향과 나란하게 놓았다. 관대의 상면 주연에는 凸형의 몰딩을 각출시켜서 관의 위치를 바르고 정중하게 표시하였다.
주무덤의 북쪽 밖 돌담흔적의 면에 접해 동서 횡렬로 남아 있는 배총군 중 동쪽의 제1배총과 제2배총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제1배총은 한 변이 약 10m이고, 제2배총은 한 변이 약 8.5m이며, 초분석도 동변과 북변에 완전하게 남아 있다.

3) 연대
장군총의 연대는 고구려 적석무덤의 편년을 적용하여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적석무덤은 학자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서기전 3, 2세기대에 발생해 서기 5세기경까지 존속되었다고 보고 있다.
장군총의 연대를 비정할 수 있는 자료는 묘실이 연도가 딸린 횡혈식석실이라는 점과 정상부와 각 층 상면, 또 묘역 안에서 발견된 기와(와당)가 있다. 압록강 중류역에 있어서 적석석실묘는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출현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근거로 한다면, 장군총의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압축된다.

4) 주인공 문제
장군총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연구자들의 추정이 있었으나, 대략 광개토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으로 갈라져 있다. 이것은 태왕릉과 장군총을 규모와 축조기술면에서 비교해 서로 선후를 가리고, 또 그것을 4, 5세기대에 가장 걸출했던 2대의 왕에 비정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에 현지를 조사했던 일본인 도리이와 프랑스인 샤반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았다. 세키노는 이와는 달리, 장군총을 호태왕비와 관련시켜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케우치[池內宏]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제10대 산상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다시 미카미[三上次男]는 축조기술이 태왕릉보다 발달되어 있는 점에서 5세기 말의 장수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최근의 나가지마[永島暉臣愼]와 다무라[田村晃一]는 장군총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있다.
한편, 북한의 학자들은 대체로 의견이 통일되어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장군총이 소재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이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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