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양가보진 북쪽 3km 위치에 있는데, 청석관(靑石關)이라고도 하였다.
산성의 남쪽에는 신개령하(新開岭河)가 흐르고 있으며, 산정에서 사방을 조감할 수 있고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적합한 지리적 형세이다. 성안에는 1839년에 창건한 작은 낭랑묘(娘娘廟)가 있어, 낭랑산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낭랑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뉘는데, 내성의 길이는 2.8여km에 이르고, 외성은 약 2.4km이다. 외성은 반원형으로 내성에 이어져 있다.
성벽은 산 능선을 따라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석축(石築)산성인데, 문화대혁명 때 많이 파괴되었으나 서쪽의 산능선 부근의 300여m가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대략 3∼9m, 너비는 상단부가 2.5∼3m 정도이다.
동서남북에 모두 문지(門址)가 있으며 계곡 입구에 자리잡은 동문(東門)이 폭이 3m 정도로 가장 규모가 크며 정문의 기능을 하였다. 또 방어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문의 남쪽에는 3개의 치(雉 : 성벽에 돌출시켜 쌓은 성벽)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많이 무너져내렸다.
성안에는 저수지가 있고, 성의 서북쪽에는 3단으로 축조한 봉수대(烽火臺)가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은 상당히 무너진 상태이다. 또 성 남쪽의 험준한 곳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 연개소영(淵蓋蘇英)의 무덤으로 전하는 대형 분묘유적이 있는데, 만주국 때 일본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 산성은 규모나 지리적 위치로 보아 고구려 당시에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으로 보이며, 대체로 고구려의 적리성(積利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적리성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당태종의 대규모 침략이 실패하고 2년 후인 647년(보장왕 6)에 당의 장군 우진달(牛進達) 등이 석성을 쳐서 함락하고 이어 적리성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석성을 요령성 장하현(莊河縣)의 성산산성(城山山城)으로 비정할 경우, 당시 작전의 전개 방향으로 볼 때 낭랑산성이 적리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 《삼국사기》 지리지 4에 수록된 〈목록 目錄〉에 고구려 멸망기에 압록강 이북의 도망한 7성(城)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 수암현은 청나라때에도 배가 들어올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였다, 허나 황해의 대고산성(대행성)에서 대양하를 따라 수암으로 들어오는 곳에 낭낭성을 제외하고 여직 산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