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수변(遼東水邊)에서 가장 험하고 견고하였던 고구려의 요새로 612년과 613년 수(隋)나라의 1·2차 고구려침입 때 적이 비루(飛樓 : 원두막과 같이 높다랗게 솟은 널빤지집으로 위에는 쇠가죽을 덮고 아래에는 긴 사닥다리가 붙어 있어 그 위에 올라 성문을 내려다 보고 공격하는 것)·동차(橦車 : 큰 궤에 바퀴를 달고 그 속에 들어가서 쇠뭉치 같은 것으로 성 밑을 쳐서 파괴하는 것)·운제(雲梯 : 큰 平床 모양으로 바퀴 여섯 개를 달고 그 위에 세 길이 되는 사닥다리 두개를 마룻대로 서로 연결하여 접었다 폈다 하는 기계)·지도(地導 : 성 가까이 굴을 파들어가 공격하는 것) 등으로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성의 방어가 워낙 튼튼하여 함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 아군이 성 주위에 참호를 깊이 파 접근이 불가능하자 적은 흙을 져다가 참호를 메우고 포차(抛車 : 큰 돌을 날리는 지금의 대포와 비슷한 기계)·동차로 공격하면서 10여일의 악전고투에도 성을 함락하지 못하다가 하루는 마침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 화공(火攻)으로 성루와 성안의 가옥을 거의 태우고 장졸(將卒)을 성위에 올려보내어 마침내 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함락 당시 성안의 병(兵)으로 포로된 자가 약 1만명, 남녀민수가 4만명, 양곡이 50만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의 구조는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발견된 요동성총(遼東城塚)의 성곽도(城郭圖)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성곽도는 전실(前室) 남벽 좌우벽에 그려져 있는데 ‘요동성(遼東城)’이라 먹으로 씌어 있어 무덤의 주인이 요동성 출신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곽도에 따르면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羅城)이 있는 중국식 성곽으로서 내성 안에는 목탑인 듯한 요동성탑(遼東城塔)이 그려져 있고 성벽 위에는 각종 여장(女墻 : 성벽 위에 쌓은 담)이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린 여장을 통하여 네모난 사혈(射穴)까지 내었음을 볼 수 있다. 또, 문에는 문루(門樓), 성의 모서리에는 각루(角樓)가 설치되어 있다. 요동성총의 성곽도는 우리 나라 성곽사(城郭史)에 외성의 구조가 처음으로 보이는 자료로서 중요시된다.
요동성총의 축조 연대를 4세기 후반 이전으로 올려볼 수 있다고 하므로 요동성의 축조연대는 그 이전으로 올려볼 수 있겠다. 따라서, 우리 나라 성곽에 외성이 시설된 것도 그 시기까지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동성은 중국식 성곽으로서 고구려인이 축조하였다기보다는 중국인이 축조한 것을 고구려가 점령한 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요동성의 높이는 대략 30m가량으로 알려져있는데 어마어마한 높이다보니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으나 2014년 경에 풍납 토성의 성벽 높이가 14m인 것이 확인되면서 요동성의 높이가 어마어마했을 가능성도 함께 올라갔다. 사실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었던 요동성은 높은 성벽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다. 유럽에서도 대포가 도입되면서 성벽의 높이가 낮아졌지만 대포가 없을 시기에는 성벽이 높을수록 유리했고 산성이 아닌 평지성에서는 더더욱 높은 성벽이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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