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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안고성 |
중문: 农安古城 |
본명: 부여부 扶余府 |
위치: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
중문: 吉林省 长春市 农安县 |
규모: 둘레길이 3840m, 해발 m |
유형: 평지성 |
축조년대: 부여, 고구려, 발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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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안고성(農安古城)은 송요평원(松遼平原) 중서부, 이통하(伊通河) 좌안의 농안시(農安市)에 있다. 남쪽으로 장춘시(長春市)와 70㎞, 동쪽으로 이통하와 1㎞ 떨어져 있다. 장춘(長春)~백성(白城) 철로와 도문(圖們)~오란포특(烏蘭浩特) 도로가 성 서쪽 400m 지점을 남북향으로 지나간다.
농안고성의 평면은 방형이다. 둘레 길이는 3,840m이며, 동벽은 936m, 서벽은 937m, 남벽은 984m, 북벽은 983m이다. 성벽 중간에는 각각 문지가 한 곳씩 있다. 이 밖에도 각각 동·서·남 문지 옆에 작은 문이 있다. 성벽은 흙을 판축하여 쌓았다. 성벽 네 모서리에는 모두 각루가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이미 민가가 들어섰다.
농안고성은 부여국에 쌓은 것으로, 후기에는 부여국 왕도가 있던 곳이다. 그 이후에는 다시 발해·요·금·원·명·청 등 역대에 걸쳐 사용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농안고성은 발해국시기 부여부의 소재지였고, 또한 서쪽으로 거란을 방비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고 인식한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다시 부여부를 황룡부(黃龍府)로 고쳐 불렀다. 금이 요나라를 멸망한 이후 다시 황룡부를 제주(濟州)로 고쳐 불렀다. 현재 고성의 형태는 대체로 요·금·원시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옛날의 부여국 왕성과 발해국 부여부의 모습은 없으므로 발해국시기의 부여부 성의 형식·둘레·건축시설 등은 고찰할 수 없다. 단지 역사문헌에 근거하여, 이 성이 원래는 발해국 부여부 고지였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학계에서 고증한 발해 부여부가 바로 지금의 농안고성지임이 틀림없다면, 농안 부근에도 발해국의 고성 또는 기타 유적이 존재할 것이다. 현재로 보면, 발해 서부지역의 강역문제와 그 문화유존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불충분하다. 그러나 고성으로만 말하면, 지금의 길림성 농안·부여 일대 고성 유적 중에서 치[馬面]가 없는 소형 고성지가 있는데, 도대체 언제 축조된 것인가에 대해서 아직 정확한 판단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고성은 요금 내지 원·명시기에 모두 이용되었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치[馬面]가 없는 특이한 현상도 분명하게 해석하기 어렵게 한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면, 이러한 고성의 시축년대는 아마도 요금시기보다 빠를 것으로 생각되는데, 발해의 서쪽이 거란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아울러 항상 정예군을 주둔시켜서 수비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이러한 고성은 바로 발해의 서쪽에 설치한 방어시설이 아닌가 한다. 지금의 농안고성 서쪽, 즉 발해의 부여부 고지 서쪽 또는 지금의 장령현 부근에도 이러한 고성이 분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령현 십가호향(十家戶鄕) 십삼호촌(十三號村)의 십삼호고성지(十三號古城址)는 평면이 방형이고, 치[馬面]는 없고, 각루는 있다. 둘레 길이는 746m이며, 성안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흙기단이 있다. 또한 장령현 팔십팔향(八十八鄕) 팔십팔호촌(八十八號村) 동오십구호둔(東五十九號屯)에서 서북쪽으로 50m 떨어진 동오십구호둔고성지(東五十九號屯古城址)는 둘레 길이가 542m이며, 각루와 동서 양쪽에 측성이 딸려 있으나 치[馬面]와 옹성문은 없다. 이 뿐만 아니라 장령현 신안진(新安鎭) 오수대촌(烏樹臺村) 오수대고성지(烏樹臺古城址)는 평면이 장방형이며, 둘레 길이는 152m의 각루가 있으나, 옹성문과 치[馬面]는 없다.
이러한 고성에서는 비록 수많은 요금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축조년대에 대해서는 고성의 형식특징으로 보면, 요금시기보다 빠른 고성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는 고고발굴 이후에야 고성의 건축년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므로 지금은 발해 말기의 고성지로 잠정결론은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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