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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 고조선 알타이
와당 벽화 비문 인장 사료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호태왕비
중문: 好太王碑
본명:
위치: 길림성 통화시 태왕향
중문: 吉林省 通化市 太王乡
규모:
유형: 비문
축조년대: 고구려 중기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비과 같은 곳에 있다.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 여기에서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고 해석했는데, 이후 이 신묘년 기사를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선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는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9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지리적 이점이 큰 중국에서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 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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