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황, 구조
철배산은 해발 283.1m로서 혼하․소자하(渾河․蘇子河) 합류지점 사이에 동서로 뻗어있다. 산성은 서쪽 끝자락에 기다랗게 자리잡고 있는데, 사방은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산성 북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남쪽도 가파르고 험준한 산비탈이다. 현존하는 성벽은 청대(淸代)에 축조한 계번성(界藩城)으로서 고구려 시기의 본래 모습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산성의 평면구조나 축조방식 등에 고구려 시기의 면모와 특징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성(東城)의 성벽 아래층에서 설형석(楔形石)으로 축조한 고구려 시기의 성벽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었는데, 총 둘레는 4,612.5m이다. 절벽과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험준한 자연지세를 충분히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산등성이에 돌로 성벽 아랫부분을 축조한 다음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상단부를 흙으로 덮었다. 산성은 서위성(西衛城), 내성(內城), 동위성(東衛城) 등으로 이루어진 복곽식 산성이다.
서위성은 철배산 가장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였는데, 남쪽으로 소자하 하구(蘇子河 河口)를 직접 공제(控制)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혼하 하곡이 내려다보인다. 성벽은 흙으로 축조하였는데,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든 다음 외벽 아래쪽에 성돌을 박아서 성벽을 보강하였다. 평면은 대략 정방형으로 둘레 325m, 높이 2m, 너비 1.5m이다. 성문은 남문이 하나 있고, 성 내부 중앙에 높이 6m, 면적 28㎡인 천연석대가 있다.
내성은 철배산 중간의 산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좁고 기다란 산등성이 양쪽의 절벽과 낭떠러지를 천연성벽으로 삼았다. 북벽은 길이 1,212.5m로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낭떠러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초벽장(峭壁墻)’으로 명명되었다. 남벽도 길이 1,362.5m로서 경사도가 75도 이상이며, 수직고도의 높이만 40~80m나 되는 ‘석파장(石坡墻)’이다. 이처럼 내성은 동서 길이는 긴 반면, 남북 너비는 좁은 곳은 1m, 가장 넓은 곳도 85m에 불과하다. 전체 1,210m 가운데 1,120m는 좁고 기다란 산등성이에 불과하며, 동단의 90m 정도에만 너비 18~20m의 평탄한 산마루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 청 태조 노이합적(努爾哈赤)의 행궁(行宮) 건물터가 자리잡고 있다. 성문으로는 서문과 동문이 있는데 각각 서위성과 동위성으로 연결된다.
동위성은 내성의 동쪽 대지상에 위치하였다. 내성이 위치한 주봉우리보다 낮으면서 산등성이는 남쪽으로 뻗어 있다. 북부와 동부는 내성의 남벽과 같은 ‘석파장(石坡墻)’이며, 대지 남쪽 가장자리에는 토석혼축법으로 남벽으로 구축하였다. 성벽의 너비는 1~1.5m, 높이는 2m이다. 성문은 북문과 남문 3개 등 모두 4개가 있으며, 남문 안쪽에 청대(淸代)의 건물터가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성격
철배산성은 청 태조 노이합적(努爾哈赤)이 1619년에 1만 5천여 명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는 계번성(界藩城)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철배산성은 평면구조, 축조방식, 동성(東城)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형석(楔形石) 성돌 뿐 아니라 문헌자료상으로도 고구려 성(城)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철배산성은 혼하․소자하의 합류지점 곧 342년 남도․북도의 분기점에 위치한 남소성(南蘇城)에 비정된다. 남소성(南蘇城)은 문헌자료상 345년에 처음 등장하며, 대체로 고구려가 혼하방면으로 진출한 4세기 전반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뒤 남소성(南蘇城)은 신성․목저성(新城․木底城) 등과 함께 요동에서 국내성 방면으로 침공하는 적군을 방어하고, 또 요동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중진(軍事重鎭)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345년 전연(前燕)의 공격을 필두로 400년 후연(後燕) 모용성(慕容城), 647년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군(唐軍), 666~668년에는 계필하력(契苾何力)이 거느린 당군(唐軍) 등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 조에서 보듯이 혼하․태자하 일대의 신성․양성․양곡(新城․梁城․梁谷) 등과 함께 남소성(南蘇城)에서 왕릉 수묘를 위한 연호(烟戶)를 차정하는 등 지방지배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군사적인 방어역량도 강화하였다. 따라서 남소성(南蘇城) 곧 철배산성(鐵背山城)은 요하 유역의 다른 고구려 성처럼 군사기능 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추정된다. 다만, 철배산성(鐵背山城)은 동서 방향의 좁다란 산마루에 위치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는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철배산성 동남쪽 15km에 위치한 신빈 오룡산성(新賓 五龍山城)이 매우 주목된다. 오룡산성(五龍山城)은 둘레 약 2km의 포곡식 산성으로서 군사방어적 기능과 함께 거점성의 면모도 함께 갖추고 있다. 두 산성이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호보완적인 관계도 설정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당(唐)은 666년 남소성(南蘇城)을 함락시키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신성에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를 두는 한편, 소자하 연안의 창암성․목저성 등과 함께 남소성에는 ‘주(州)’를 설치하여 고구려고지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唐)의 고구려 지배책은 고구려 유민의 반발과 발해의 건국으로 곧 무산되었고, 8세기 전반 문왕(文王)대에 발해가 고구려의 목저성~현토성(木底城~玄菟城)지역 곧 남소성(南蘇城)을 비롯한 소자하~혼하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