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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발발자유적 (왕팔발자) |
중문: 万发拔子遗迹(王八脖子遗迹) |
본명: |
위치: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중문: 通化市 金厂镇 跃进村 |
규모: 둘레길이 m, 해발 m |
유형: 산정식 보루 |
축조년대: 고조선, 부여 시대, 고구려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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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시 금창진 약진촌과 환통향 강남촌의 경계지점에 있는 작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에 위치.
유적지 서부는 둥근 언덕, 동쪽에는 완만한 산등성마루와 연이어진 구릉과 접하고 있다. 유적지는 통화-집안 도로가 동북지구와 서남 지구를 관통하면서 동서로 양분되어지는데 서부는 원구, 산등성마루에는 생활거주지가 다수 보인다. 동부는 고분의 주요 분포지역으로, 대다수 고분은 동부 제1층 아래 생토층을 파괴하였다. 유적지 남측에는 현대 촌락이 자리하고 있으며 약 250m 떨어진 곳에서 金廠河가 유적지 동남부를 지나 혼강으로 유입된다.
북쪽 약 3㎞ 거리에 통화시 위치하고 북동쪽 5㎞ 거리의 혼강 동안에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인 九仙峰 유적이 있다. 북서쪽 5㎞ 거리의 혼강 서안에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西山 고분군이 있다. 남쪽 13㎞ 거리에 고구려 시대의 江沿村 고분군이 위치하고 남쪽 20㎞ 거리에 고구려 시대의 南頭屯 고분군이 위치한다. 서남 방향의 환인 고구려 유적지와는 약 100㎞ 떨어져 있있다.
만발발자 유적지는 고구려 문화와 청동기문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신석기시대 中晩期, 商周, 春秋戰國, 兩漢, 魏晉, 明에 해당되는 6개 층위관계가 확인되었다. 무덤은 土坑墓, 土坑石槨墓, 土坑石槨石棺墓, 大蓋石墓, 大蓋石積石墓, 積石墓, 階壇積石墓 등 7개 형식이 확인되며, 춘추전국·양한·위·진 시기의 3시기에 해당된다.
출토유물과 고분 형식에 의해 연대를 추정해보면 토갱묘, 토갱석곽묘 토갱석곽석관묘, 대개석묘 등은 춘추전국 시기로 기원전 3세기에 해당, 대개석적석묘와 적석묘는 양한 시기로 기원전 2~1세기에 해당, 계단적석묘는 위진 시기로 기원 4~5세기에 해당된다.
土坑墓, 土坑石槨墓, 土坑石槨石棺墓, 大蓋石墓, 大蓋石積石墓, 積石墓, 階壇積石墓 등이 분포, 이 고분들은 石板墓에서 積石墓 순으로 발전해간다. 토갱묘와 토갱석곽묘 두 고분 모두 고구려 이전의 유적으로, 연대는 대체로 춘추전국시기이다. 單人仰身曲肢葬墓과 多人合葬墓로 크게 구별된다. 연대는 토갱묘가 토갱석관묘보다 상대적으로 빠르다. 토갱석곽석관묘의 연대는 戰國 中晩期에 해당되며 당시 多人·多次 화장이 성행했다. 대개석묘의 연대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에 해당된다. 대다수 지세가 험준한 산등성마루 위에 분포한다. 묘내에서 화장하여 인골은 모두 불탔으나 탄 정도는 높지 않다. 대개석적석묘는 대개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총 사이의 과도기 묘제로 장제 방식은 대개석묘와 서로 같으나, 割石으로 蓋石을 덮었다. 계단적석총은 고구려의 전형적 고분으로 연대는 위·진 시기에 해당되며.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장례형식에서 전승관계가 명확하다.
왕면후는 예와 맥을 분리해보는 입장에서 통화 만발발자 유적지의 3기와 4기의 고분을 고구려에 선행한 맥족의 문화로 설명한다. 즉 제3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대석개묘·대석개적석묘·조기방단적석묘는 '혼강 및 압록강'과 '태자하 및 혼하' 유역에서 상응하는 시기의 석묘·출토품과 동일한 성질에 속하므로, 고구려가 혼강에 건국되는 서한 중기 이전에, '혼강 및 압록강'과 '태자하' 상류를 중심으로한 古 "貊"(高夷) 유적지이다. 이는 "高句麗先世文化" 또는 "前高句麗時期의 문화"로 명명된다.
만발발자 "4기" 및 그 이하의 석개묘와 적석묘 등 주요 葬式·葬俗·遺物을 "고구려조기 유적지"로 부르나, 이는 고구려건국 이전의 "맥"족 유적으로, 그 북쪽의 夫餘文化先世 "濊"족의 특징은 극히 드물다. 즉 만발발자 "3기"의 토갱묘와 토갱석곽(관)묘는 대표적 앙신굴지이고, 화장습속은 드물고, 소량의 삼족기가 비교적 조기 고분형식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춘추전국 이전에 송화강 유역의 古 "濊人", 즉 "서단산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길림시를 중심으로 "서단산문화구", 예컨대 일찍 발견된 猴石山, 長蛇山, 狼頭山, 兩半山 등 청동문화의 무덤은 모두 토갱석관묘를 주요 葬式으로 갖추고 있다.
출토된 도기는 다수가 중원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三足鼎·隔 등으로 만말발자 3기의 문화는 서단산문화이 영향으로 예족과 맥족의 문화가 남북으로 교류한 결과이다. 오강원은 만발발자 유적을 통화 지역문화가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느슨한 청동기 사회에서 완전한 청동기 사회로 변모하고, 기원전 2~1세기에서 토갱묘·석관묘에서 적석묘로 급격히 변모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통화지역에 원고구려문화, 즉 적석묘문화가 출현하는 시점은 요동 동부의 다른 지역보다 1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2~1세기로, 요동반도의 적석묘 문화가 환인집단을 경유하여 통화지역으로 전해졌고, 통화지역에서는 적석묘 문화의 형성과 함께 방어적 성격이 강한 환호와 구상 유구를 갖춘 대형 취락이 등장한다고 보았다. 기원전 3세기의 사회의 완만한 변화 양상을 볼 때, 통화지역의 토착집단이 주변과의 교섭을 통해 내적으로 변화한 반면 기원전 2~1세기의 급격한 사회변모는 혼강 중류 유역 환인 방면으로부터 들어온 적석묘집단에 의해 지역집단이 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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