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안 산성은 한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고구려 때 개축해 요·금대까지 사용한 산성이다. 고구려 때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지방 지배의 거점 확보를 위해 개축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자안 산성은 통화시 문화국(通化市文化局)의 문화지(文化志) 편집팀이 1983년 봄에 제1차 조사를 하였고 이어 6월에 산성을 실측하고 촬영하였다. 1985년 통화시 문물조사대(文物調査隊)가 조사와 실측을 재차 실시하였다. 1989년에는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에서 다시 정밀한 조사·실측을 실시하였다.
자안 산성은 통화시 강동향 자안촌 협심둔의 북산(北山) 정상에 위치한다. 통화시 중심지에서 4㎞ 지점에 있다. 산성의 서남쪽은 하밀하(哈蜜河), 동쪽은 혼하(渾河)와 잇닿아 있는데 산성의 남쪽에서 두 강이 합류한다. 서쪽과 북쪽으로 산봉우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해발 526m이다.
자안 산성의 평면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은 장방형이다. 남북 길이 925m, 동서 너비 300~450m, 전체 둘레 2,273m이다. 남쪽 지역의 폭이 좁은 편이다. 성 내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북쪽이 남쪽보다 높다. 성벽은 돌로 축조하였다. 돌은 길이 38~42㎝, 너비 18~20㎝이다.
산세가 완만한 서쪽과 북쪽에 석재로 성벽을 축조하였고, 산세가 험준한 동쪽과 남쪽은 절벽을 천연 성벽으로 삼았다. 서벽은 길이 957m로 돌로 축조하였다. 산의 자연 지세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완만한 곡선을 이룬 곳이 많다. 만곡하는 곳의 바깥쪽에는 1~5층의 보조 성벽을 축조하였다. 서벽의 북쪽이 가장 많이 굽었고 남쪽은 파괴된 곳이 많다. 서벽에 2개의 성문 터가 있다.
남벽은 길이 347m로 동단의 지세가 비교적 높다. 남벽의 밖은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로 아래쪽에 혼강(渾江)이 흐른다. 동벽은 길이 1,107m로 가파른 절벽의 가장자리를 자연 성벽으로 삼고 그 위에 돌을 포개어 쌓았으며, 낮고 움푹 들어간 곳을 돌로 메웠다. 지세가 가장 높은 곳으로, 굽고 꺾인 곳이 많으며, 남단과 북단의 성벽 바깥쪽에 평대(平臺)가 여러 개 있다.
북벽은 길이 362m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외벽의 높이는 2m이고 성벽 위쪽은 20㎝ 두께의 흙으로 덮여 있다. 성문의 바깥쪽은 완만하게 경사진 산비탈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산을 내려갈 수 있다. 북문 동쪽 100m 지점에 돌로 쌓은 배수구가 있고 서쪽과 동쪽의 모서리에 문루[각루(角樓)] 시설이 남아 있다.
남벽의 내벽은 서남 모서리의 정문에서 200m 정도 축조되어 있는데, 구불구불하게 동벽을 향하고 있다. 토벽의 중간 지점에는 높이 2m 정도의 원형 흙더미가 있다. 남벽의 내벽에 해당한다.
자안 산성의 서쪽과 남쪽의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어 2012년 현재, 성벽의 기초만 확인되지만, 서벽의 북단과 북벽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성벽 위쪽은 10~20㎝ 두께의 흙으로 덮여 있다.
자안 산성은 한대(漢代)에만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이 모두 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서는 자안 산성의 서남쪽 30㎞ 지점에 현토군(玄菟郡) 상은대현(上殷臺縣) 치소로 추정되는 적백송 고성(赤柏松古城)을 주목한다. 자안 산성은 한의 현토군의 설치와 함께 축조되었다가 현토군이 요동 지역으로 물러나며 그 운용이 중단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산성의 축조 방식 및 출토 유물이 집안 지역의 산성자 산성(山城子山城) 내지 패왕조 산성(覇王朝山城)과 유사하다는 점으로 보면, 고구려가 이를 개축하였다고 여길 수 있다. 또한 성 내부에서 요·금대의 기와편이 나왔는데, 이를 고려하면 이때까지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더욱이 자안 산성은 혼강 상류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점들로 보면 자안 산성은 한대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해도 고구려가 이를 개축해 후대까지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지리적 위치나 규모를 감안하면 단순한 군사 시설일뿐만 아니라 지방 지배의 거점이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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